‘이 그림, 어디서 봤더라?’

영화 ‘관상’의 포스터 중 주인공 송강호의 얼굴이 화면 가득 차있는 사진이 있다. 양 볼로 흩날리는 수염, 번민과 고뇌가 깃든 눈빛을 보면 조선시대 한 천재화가의 자화상이 떠오른다. 바로 국보240호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다.

공재 윤두서가 40대 후반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수염이 한 올 한 올 살아 있는 섬세한 붓놀림, 사진을 찍은 것만 같은 인물의 세밀한 묘사로 내면의 카리스마까지 느낄 수 있다. 실제로 둥근 얼굴을 빙 둘러 나 있는 수염은 금방이라도 입김에 흩날릴 것만 같고, 양 끝으로 올라간 눈매는 마음속까지 꿰뚫어볼 듯 매서우며 미소 지을 듯 말듯 꼭 다문 입, 불룩한 눈두덩이, 깊게 패인 팔자주름에는 반 백 살 선비의 고독과 번뇌가 느껴진다.

이 자화상은 조선을 대표하는 회화로 손꼽힐 만큼 유명하지만, 정작 그림을 그린 윤두서에 대해서는 다소 낯설다. 그러나 그가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증손자이자,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외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면 그의 작품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조선에는 3재로 일컬어지는 천재화가가 있다. 겸재 정선, 그의 제자 현재 심사정, 그리고 공재 윤두서(1668~1715)다. 그는 벼슬길에 올라 나라의 앞날을 이야기하기보다 백성들 틈에 들어가서 일반 서민들의 삶을 이야기했던 선비화가였다.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증조부 때부터 봐왔던 격렬한 당쟁이 싫어 벼슬을 포기했다. 특히 30세에 친형 윤종서가 고문을 받다가 감옥에서 숨을 거두자 출세보다는 학문과 시, 서, 화에 열중하며 일생을 보냈다.

공재 윤두서는 조선 후기 회화의 개척자이자 조선 유일의 자화상 화가로 불리며 사실적인 그림 화풍을 중시했다. 소재 또한 나물 캐기, 밭 가는 농부, 짚신 삼는 사람 등 하층민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해 우리나라의 풍속화의 새로운 지평을 일궈냈다. 그런 그를 신의 경지에 올린 그림은 따로 있다. 다름 아닌 ‘말 그림’이다.

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윤두서는 말(馬) 그림에 있어서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로 평가된다. 조선후기 사실주의 회화를 연 주역으로서 그의 말 그림은 눈앞에서 생생하게 움직일 것만 같아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적인 작품이 ‘유하백마도’다.

버드나무 기둥에 매어있는 백마는 언제라도 달릴 준비가 된 듯 뒷발 하나를 들고 옆으로 서있고, 버들가지는 물결치듯 바람에 흔들리며 땅에는 푸릇푸릇한 풀들이 돋아나고 있다. 왠지 ‘말’이라고 하면 강인한 근육, 분출하는 에너지 등을 화폭에 담았을 것만 같지만, 흠결 없이 하얀 유하백마도 속의 말은 유연하고 점잖으며 눈매는 유순하고 인자하다. 말안장이나 재갈 등이 없이 자유로운 걸 보면 평소 말에 대한 그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윤두서가 사실화풍에 얼마나 열의를 가졌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일화가 있다. 그가 말그림을 그릴 때면 마구간 앞에 서서 종일 말을 보고 털끝만큼이라도 비슷함에 의심이 없어야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말에 대한 애정도 각별해서 함부로 다루거나 등에 올라타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그에게 말은 인간과 다름없는 대상이었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말들은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함부로 몸을 놀리는 등의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켜 ‘품격’을 드러낸 것이다. ‘마상인물도’에 등장하는 말과 선비는 이러한 사실적인 묘사 기법과 선비로서의 품격이 잘 드러낸다.

말들이 신나게 들판을 뛰노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군마도’는 말에 대한 그의 애정과 묘사력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한가하게 풀을 뜯는 말과 냇물을 헤엄치려는 말, 어미젖을 빨고 있는 새끼말의 모습까지, 갖가지 말의 자태를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생동감 넘치는 말그림으로 대표적인 작품이다.

여기서의 말은 정확한 사실성은 없지만 몇 번의 붓질로 순식간에 말의 형체를 완성한 과감함이 있다.
말에 대한 오랜 관찰과 통찰력, 누적된 회화실력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일필휘지(一筆揮之)가 될 수 없었을 것. 이에 한국 회화사에서는 윤두서의 말 그림을 두고 ‘선구적인 안목으로 새로운 화법을 도입했다’는 평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또 다른 작품에서는 세밀한 묘사와는 상반되는 해학적인 풍속화가 있다. 보고 있노라면 빙긋이 웃음이 나오는 ‘낙려’, 말 위에 있던 사람이 무슨 일인지 말에서 떨어지고, 옆에 있던 아이가 정신없이 뛰어가는 모습이 섬세하고 재미있게 표현 돼 있다. 말 위에 탄 사람이 술을 한 잔 걸쳐서 혹시 음주운전을 한 것은 아닐까? 졸면서 가다가 말에서 떨어진 게 아닐까? 이런 재미있는 추측을 하게 한다.

그런데 사실 이 그림은 중국 당말에서 송초까지 살았던 희의선생 ‘진단’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그는 여러 왕조가 바뀌고 새 황제가 등극할 때마다 참된 군주가 아니라는 이유로 항상 얼굴을 찌푸렸는데, 어느 날 흰 나귀를 타고 하남성 개봉으로 가던 중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박장대소하며 너무나 좋아하다가 그만 나귀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그는 "천하가 이제 안정되리라"라고 외쳤는데, 이 순간을 실감나게 표현한 것이다.

특히 이 그름은 기존의 산수화의 고정관념을 깨고 청록색을 곳곳에 파격적으로 사용한 청록산수란 점 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화사하면서도 산뜻한 청록을 써서 태평성대를 바라는 군주와 백성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듯 공재 윤두서는 ‘사대부, 양반’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백성들과 소통하고 그림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배워갔다. 전라남도 해남의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찾으면 해남 윤씨 종가인 녹우당(綠雨堂)이 있다.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다. 이곳에는 유물전시관이 따로 있는데 윤두서와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돼 있어 이곳을 찾으면 언제든 그의 발자취를 살펴 볼 수 있다.
늘 사람보다 한 발 물러나있었던 말을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승격시켰던, 조선 회화의 선구자 공재 윤두서, 세상을 등지고 글과 그림을 벗 삼은 그에게서 자연과 사람, 동물을 사랑한 진정한 예술가의 면모를 발견한다.

<출처>
*조선시대 천재화가 ‘공재 윤두서 300년’ 조망(2014년10월27일자 광주매일신문)
*윤두서 가문 3대 회화전...밀레 ‘이삭줍는 사람들’ 닮은 ‘채애도’ 볼만(2016년5월3일자 경향신문)
*백성을 사랑한 화가, 윤두서(저자 김해원, 웅진주니어, 2014)
*공재 윤두서(저자 박은순, 돌베개, 2010)
*이미지 출처_고산 윤선도 홈페이지/ 영화 ‘관상’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