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사람은 나면 한양으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대는 바뀌어도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서울이 일자리도 많고 다양한 문화생활이 가능한 대한민국의 수도임을 감안하면 서울로 몰려드는 이유가 충분히 설명됩니다. 그런데 말은 대체 왜 제주로 보내라 했을까요?

제주도에서 한라산 기슭을 한바퀴 돌아보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말들을 많이 보셨을 겁니다. 단순히 ‘여유롭다~’ ‘목가적이다’ 이런 짧은 생각만 하고 지나쳤을 텐데요. 동물원에도 없는 말들을 제주에서는 아주 쉽게 볼 수 있었던 이유. 바로 제주도가 국내 말생산의 중심지이기 때문이죠.

제주도의 말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정성껏 키운 말을 바쳤다는 ‘헌마공신(獻馬貢臣)’ 김만일. ‘헌마공신’이란 ‘말을 바쳐 공이 있는 신하가 되었다’라는 의미인데요. 지금부터 헌마공신 김만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제주에서 언제부터 말이 이렇게 많이 사육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려시대 삼별초가 제주에서 항쟁할 때도 군마 생산에 심혈을 기울였고, 정복당한 후에도 몽고에 군마를 조공하는 생산지였음은 어렴풋이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배웠던 내용으로 기억합니다.

한민족 오천년 역사상 2백여 회가 넘는 외부의 침략을 이겨낸 저력의 민족이란 말. 학창시절 익히 들었던 이야기이죠. 선조들은 전쟁을 대비해서 많은 군마들을 육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옛날, 전쟁에서 말은 절대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죠.

최근 개봉한 영화 ‘안시성’을 보면 개마무사로 불리던 기병대의 위엄이 잘 드러나는데, 말의 숫자가 전투결과를 좌지우지했던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상식이죠. 한국인들이 기억하는 전쟁하면 단연 이순신 장군이 떠오르는 ‘임진왜란‘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고군분투하며 왜군을 무찔렀고, 육지에서는 이름 없는 수많은 의병들이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지켜냈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임난 중 육군 전투력의 핵심인 군마를 국가에 헌납한 제주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金萬鎰)’입니다.

국내 최고 관광명소인 제주도가 최근에는 ‘올레’길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미 많이 알려져 초기의 고즈넉함은 사라진지 오래. 혼자 조용하게 걷기를 희망하는 분들에게 추천하는 곳이 바로 ‘갑마장(甲馬場)길‘입니다.

갑마장길은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마을과 주변 오름, 목장 길 등 대평원을 연결해 조성된 곳으로 총 길이 20km에 이르는 갑마장 터입니다. ‘갑마’는 조선시대 최고등급의 말을 칭하는 단어로, 갑마장하면 바로 그 말들을 키우던 곳이라는 뜻이니, 갑마장길에는 제주도 말의 역사, 아니 대한민국의 말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지역입니다.

갑마장길=김만일(1550-1632)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시작점입니다. 김만일은 대대로 부유한 집안에서 일찍이 목축 사업에 뜻을 두고 말 육성 사업에 공을 들여 크게 번창했다고 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정에서 전쟁 말이 부족해 골머리를 썩고 있었고, 전쟁의 피해로 목장은 다 파괴됐지요. 말을 보충할 수 있는 곳은 전쟁 피해가 없었던 제주도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해진 수량의 진상마와 국영목장 차출마로는 군마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겠지요. 이 때 김만일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말 500필을 조정에 헌납했고, 이후 광해군과 인조 대에도 정부가 요청하면 말을 제공했다 합니다. 당시 마필 1마리 가격이 노비 2-3명의 값어치가 있었다고 하니 헌마의 가치가 대강 어림짐작 됩니다.

세상사 공짜는 없는 법이니, 김만일의 이런 전마 조공에 조정은 벼슬을 내려 그의 공덕을 치하하게 됩니다. 조정은 ‘헌마공신’의 칭호와 관직을 제수했고, 지위는 종2품 가선대부에서 종1품 숭정대부에 이르러 제주사람으로서는 조선시대 가장 높은 벼슬을 지내게 되지요.

헌마와 벼슬 부여는 김만일의 후손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큰아들 대명은 보성군수, 둘째아들 대길은 산마감목감으로 임명하는 등 240여년(효종 9년 1658-고종32년 1895)간 그의 후손 83명이 산마감목 관직을 세습하게 되면서 총 2만여 두의 마필을 나라에 바쳤습니다.

김만일은 사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衣貴里) ’서위남마루’에 안치됩니다. 의귀(衣貴)라는 말은 인조가 김만일의 영웅적인 애국정신에 감복하여 비단옷을 보낸 것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의귀리는 바로 김만일의 출생지인데요. 현재 이곳 주민들은 마을 조합을 형성해 승마장인 ‘옷귀마 테마타운’을 설립하고, 관광객들에게 ‘헌마공신 김만일’의 생애와 업적을 알리고 있습니다.

국내 말산업의 요람으로 지금도 경주마의 90%이상을 생산해내는 제주도에 말목장을 운영 중인 한국마사회는 김만일의 말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을 기리고자, 2017년부터 ‘호국영웅 헌마공신 김만일상’시상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출처 : 한국마사회 홈페이지